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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회

박정희 정부 수출주도 산업화

by Stive Jo 2023.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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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수출주도 산업화를 추진하여 한국 경제를 현대화하고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이 정책은 당시 한국의 경제적 상황과 국제 시장의 변화에 대응하여 수출을 중심적으로 한 산업화를 진행하였다.

수출주도 공업화의 수출촉진을 위한 산업부문별 기업지원

첫째, 수출 산업을 선정하고 육성하는 산업 선택과 집중 정책을 추진하였다. 타일, 섬유, 가방 등 1차 가공 산업과 철강, 자동차 제조업, 전자제품등을 양성하였다. 이를 위해 관련 기업들에 대한 금융지원, 세제 혜택, 인력 양성 등을 실시하였다.

둘째, 수출 기업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였다. 수출 기업들은 유동 자금 확보, 수출 보증, 수출 신용보험, 수출시장 개척 등을 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수출 기업들은 수출 거래를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고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수출주도 산업화의 결과는 한국을 금속, 자동차, 섬유, 전자 제품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경쟁력 있는 기업들을 육성하고 성장시켰다. 특히, 한국은 가공 수출에 의존하던 경제에서 자체 기술력과 브랜드 가치를 갖춘 고부가가치 제품 수출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경제 성장을 이루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구로공단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공단으로써 196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73년까지 3 공단까지 건설이 되었고 이곳에 1978년 기준으로 11만 4천 명이 종사하였다. 한국의 '수출주도공업화'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수출주도 공업화는 또한 한국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고 수출을 통해 외화를 확보하여 국제 결제 능력을 강화했다. 이는 국제 사회와의 경제적 연결과 글로벌 시장에서의 입지를 높이는 데에 기여했다.

세계는 2차 대전이 끝난 후부터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시기까지 고도성장을 했다. 선진국에서는 경제성장으로 소득과 임금이 크게 상승하여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자연스럽게 의류, 완구, 가발, 신발, 전자 등 단순 가공 경공업들은 노동임금이 싼 개발도상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때 우리 한국은 양질의 노동력을 가진 나라로써 경공업을 유치해 선진국에 공산품을 수출할 기회를 잡았다.  이러한 수출주도 산업화 정책은 국내 시장의 발전을 소회 시키고 소비자들에게 높은 가격을 부과할 수 있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또한 산업 분야에서 환경오염과 과도한 자원 소모등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다.

노동력 수출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대한민국은 농업사회였다. 당시 한국의 노동력은 농촌을 중심으로 있었기 때문에 노동력 공급이 제한적이었고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노동록의 추가적인 확보가 필요했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는 농촌지역에서 노동자를 모집하고 농촌 지역에서 도시로 이주를 유도하여 노동력을 수출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는 '노동자 수출'이라고 불리는 정책이었다. 노동력 수출의 주요 동기와 효과는 첫째, 노동력 수출은 경제 발전을 위해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함으로써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한국 경제의 수출 주도 성장에는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기술과 인력의 필요성이 컸다. 따라서 노동력 수출은 산업 분야의 성장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필수적인 수단으로 되었다. 둘째, 노동력 수출은 농촌 지역에서의 과잉 인구 문제 해결과 경제 격차 해소를 목표로 하였다. 당시 한국은 농업부문에서의 생산성 향상과 농촌 인구의 도시로의 이주를 통해 농촌 과인 인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박정희 정부는 도시 지역에서의 산업 인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농촌 지역에서 노동력을 모집하여 도시로 유입시켰다. 노동력 수출은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이루어졌으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분야는 제조업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저임금, 불안정한 근로 조건, 힘든 노동환경 등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노동력 수출로 대표적인 것은 베트남전 파병과 건설노동자 수출이었다.

베트남 전쟁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참전을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원조와 경제적 원조를 지원받기로 약속을 받았다. 한국군이 전투병력을 파견하면 미국은 한국군 17개 주력사단의 현대화를 위한 장비와 자금 지원을 내용과 참전한 한국군의 보급에 미국이 돈을 대주면서 한국에서 쓸 전쟁물자들을 한국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 참가한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에서 복무하며 급여를 받고 소비를 하였다. 한국 군인들이 받은 급여는 한국으로 들어와 한국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소비를 증가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베트남에서 전쟁으로 황폐해진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한국의 건설업과 중공업 등의 산업이 성장하고 수출이 확대되었다.  

산유국의 경기 호황과 건설업체 중동진출

 

1960년대 가난하기만 했던 한국은 1965년 현대건설이 태국 파타니와 나라티왓을 잇는 고속도로를 최초로 수주하면서 해외 건설공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60년대 한국은 실업문제는 심각하였고 농촌은 인구문제로 심각하여 정부는 저출산을 장려하는 가족계획과 1962년 "해외이주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국민의 해외진출을 장려함으로써 인구정책, 국민경제 안정화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래서 1963년부터 광부를 서독으로 보냈고 1966년부터 간호사를 서독으로 보냈다. 이후 1965년 현대건설이 해외 건설 공사를 수주하면서 1973년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자원을 무기화를 결의하면서 산유량을 줄였다. 이에 따라 국제유가는 급격히 상승하면서 1차 석유파동이 발생하였다. 중동 산유국의 10년에 걸친 장기호황이 시작되었다. 막대한 오일머니를 기반으로 도로, 항만, 등 사회 간접자본을 건설하였다. 1973년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울라와 카이바를 잇는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사면서 중동 진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후 동아건설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대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대우건설 파키스탄 고속도로 건설 등 1985년까지 7백억 달러의 공사를 수주하였다. 7백억 달러는 우리나라가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석유 수입대금의 36%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한국 건설사의 해외 진출로 한국 건설 노동자들도 중동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1973년부터 증가한 중동 건설 노동자는 1982년 정점을 찍고 감소하였다. 감소한 이유는 1980년부터 국내 임금 여건이 개선되면서 국내와 해외 인건비의 차이가 줄었다. 그리고 중동에서 고용하는 외국인 노동자 숫자가 늘어나면서 노동시장에서 경쟁은 치열해졌다. 터키, 파키스탄 등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유입되었고 반대로 한국인 노동자 임금은 상승하는 추세였다. 마지막으로 중동 현지 건설업 상황이 나빠졌다. 건설업 상황이 나빠지면서 산유국은 자국의 건설업체에 수주비중을 늘려 나갔다. 그리고 공사대금 지급 기간도 1982년 기준으로 2~3개월 정도 걸렸지만 이후에는 3~6개월로 늦어졌다. 공사 대금에 선수급 지급 비율도 20%에서 5%로 감소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건설사는 저임금 외국인을 고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노동력 수출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었지만 일부 노동자들에게는 저음금, 불안정한 근로 조건, 분리된 가족 구조에서 나타나는 문제 등의 발생으로 노동자들의 권익이 훼손되었다. 이는 노동력 수출 정책이 사회적인 문제와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는 한계를 보여 주었다. 또한 노동력 수출은 한국 사회의 인구 구조 변화를 가져왔다.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은 농촌 지역의 인구 감소와 도시 지역의 인구 증가를 초래했다. 이로 인해 농업 부문의 생산력 감소와 도시 지역의 인프라 문제 등의 과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균형 발전과 지역 간 격차 해소에 대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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