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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회

노태우 정권 경제정책

by Stive Jo 2023.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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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권은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과 이에 이어진 민주항쟁으로 인해 큰 변화를 겪은 시기였다. 1970년대는 군사정권 아래 국가 경제의 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졌지만 독재적인 통치와 군사 정권의 압박으로 인해 민주적인 권리와 자유가 억압되는 시기였다. 광주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저항으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민주항쟁은 민주화 요구와 사회적 정의를 중시하는 시민들의 의식을 강화시켰고 국민들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열망을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노태우 정부는 민주화 과정을 진행하고 인권 보호를 강화하는 등 민주주의와 사회적 정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경제 개방과 외국인 투자 유치, 고용 창출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경제정책

  • 수출을 국가 경제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인식하고 수출 촉진을 위한 정책을 집중적으로 추진했다.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업 지원, 수출유도 및 홍보 등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은 수출품목 중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자동차, 조선산업, 반도체, IT산업, 전제제품등 수출 주도의 경제 구조로 전환되고 세계적으로 수출하는 업종을 키워나가는 기틀을 만든 시기였다.

경제구조 사례

  1. 삼성그룹: 삼성그룹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한 시기이다. 대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업 지원정책을 추진하였고 삼성그룹은 이러한 환경에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주력산업인 전자제품, 반도체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이 되기 위한 기틀을 닦았다. 1977년 흑백 TV수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1978년 업계 최초로 미국에 현지법인을 설립했도 1979년 한국전자정보를 인수하여 국내 최초로 VTR과 전자레인지를 생산했다. 반도체 사업분야는 미국과 일본보다 27년 뒤처진 1974년 12월에 파산직전인 웨이퍼 가공생산 회사"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후 엄청난 노력 끝에 1983년 64K D램 개발과 함께 생산을 위한 기흥공장을 설립하였다. 10년이 지난 1992년 삼성전자는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 메모리 강국인 일본을 추월하며 선두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더불어 1994년 245M D램, 1996년 1G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면서 차세대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다.
  2. 자동차산업: 수출주도 경제 구조 전환 이후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은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은 1962년 박정희 정부에서 발표한 "자동차 진흥 정책"과 "자동차공업보호법"을 시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자동차공업보호법:외국의 자동차 제조업체는 지역 업체와의 조인트 벤처 형태를 제외하고는 대한민국 국내에서 사업을 하는 것을 금지한다.) 당시 경성정공(기아 자동차)은 마쓰다와의 기술 제휴를 맺고 1962년 자동차 조립을 시작하여다. 새나라자동차는 1962년 닛산 자동차와 기술제휴로 설립되었다가 폐업 후 1965년 신진공업에 인수되어 1966년 신진자동차공업 만들어졌다. 이후 기아드룹에 인수된 회사이다. 1962년 동방자동차공업은 하동환자동차 제작소와 합병하여 1963년 하동환자동차공업이 되었다. 오늘날 쌍용자동차로 명칭이 변경된 회사이다. 현대자동차는 1968년 포드 모터 컴퍼니와의 기술 제휴로 설립되었다. 1970년대에는 자동차 부품의 지역화가 주요 과제였다면 1980년에는 수출 지향의 산업을 위한 대량 생산 체제를 개발하는 것이 주요 과제가 되어 현대 자동차는 엑셀 모델로 1986년 미국 시장에 진출하였고 진출하였고 진출 첫 해에 126,000대를 판매하여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가 되었다. 이후 현대자동차는 미국에 누적 수출량 100만 대를 초과하였다. 1993년 엘란트라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1993년 베스트 카"에 선정되었고, 악센트 모델은 캐나다에서 "베스트 바이 어워드"를 수상하고, 아반떼는 그해 "아시아 퍼시픽 랠리"에서 우승하였다. 
  3. 조선산업: 대한민국의 조선 산업은 1970년대에는 모두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정주영 회장의 추진력이 만나 시작된 대한민국의 조선산업은 현재 세계 조선 수주량 1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1967년'조선공업진흥법'이 제정되고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년)에서 수출전략산업으로 지정됨에 따라 조선산업은 급속하게 발전했다. 현대울산조선서는 정주영 회장의 일화 "500원 동전일화 "로 시작 되어 허허벌판에 50만 톤 크기의 조선소를 지으면서 26만 톤급 유조선 2척을 건조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후 현대조선중공업은 조선소 규모를 100만 톤으로 확장하여 단일 조선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만들었다. 1970년대 후반 정부의 중화학공업화 정책에 따라 조선산업이 크게 성장하여 건조 능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1980년에 삼성중공업, 1981년 대우조선이 조업을 개시하면서 이때부터 수주 및 건조실적이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에 이르렀고 1980년 중반에는 정부의 인위적인 해운산업 통폐합으로 침체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80년대 말부터 호황기를 맞았고 2003년부터는 세계 1위에 등극하였다.
  4. IT산업: 과거와 현재의 기준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70년대 대한민국 IT산업은 태동기에 불가하였다. 1967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KIST의 전자계산실과 한국 생산성본부 KPC의 전자계산소가 창립됨으로써 대한민국 IT산업이 시작되었다. 1971년 9월 전화요금 전산화를 위해 OCR리더를 가동하고 77년에 관세청은 세관 전산화를 하고 금융기관으로는 최초로 외환은행이 서울-부산 간 온라인 뱅킹을 구축하였다. 이후 1979년 말 각 금융기관을 시작으로 정보화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1980년대는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사용자를 위한 소프트웨어가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80년대 말에 출시된 국산 소프트웨어의 대표 격인 아래아한글과 V3백신이다. 소프트웨어 등장과 함께 하드웨어산업도 발전을 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초반 삼보엔지니어링이 설리 되어 개인용 컴퓨터를 판매하기 시작하였고 대기업을 중심으로 가전제품산업이 발전하면서 반도체와 LCD기술이 발전하는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1990년대는 IT산업의 격동기였다. 국내 소프트웨어가 다양하게 출시되고 PC통신은 90년대에 절정을 맞이하여 그 당시 하이텔, 천 리 한, 유니텔 등 PC통신은 더욱더 다양한 소프트웨어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1950년대 선박 건조 사진 / 1972년 울산 현대미포조선소 [ 출처: 국가 기록원 ]

  • 금융시장의 자율성을 강화하여 경제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금리, 외환 등 금융 시장의 자율적 운영을 도모하고 시장의 경쟁과 개방을 촉진하였다. 결과 금융기관들의 경영 효율성과 금융 서비스의 다양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금융자율화 정책 사례

  1. 금융시스템 개혁: 금융시스템을 개혁하여 기업의 자금 조달과 투자에 대한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기존의 공적자금 중심의 금융시스템을 민간자본 중심으로 전환하고 경제 활성화와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금융환경을 조성하였다.
  2. 금리자율화: 금리의 결정권을 시장에 위임하고 금리를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자율적으로 조정하도록 허용하였다. 이로써 금융기관들은 시장상황과 자체적인 경영 판단에 따라 금리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금리의 유동성과 투자 환경의 개선을 통해 기업의 자금 조달을 원활하게 만들었다.
  3. 외환시장 자율화: 외환거래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외환시장을 자율적으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외환시장의 자율화는 외국인 투자 유치와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을 촉진하는 데 기여하였다. 외환시장의 자율화는 회환 자금의 유동성을 높여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였다.
  4. 금융기관의 자율성 강화: 금융기관에게 기존보다 더 큰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예를 들어 은행들은 자체적인 대출심사와 투자 결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금융회사들은 다양한 금융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여 경쟁력을 향상할 수 있었다. 이는 금융기관들이 경쟁적이고 효율적인 금융시장을 조성하며 경제 발전을 이끌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5. 자본시장 개방: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여 국내 기업의 자금 조달을 원활히 하기 위해 자본시장의 개방을 하였다. 결과 국내 기업들은 외국자본유치를 할 수 있게 되어 자금조달과 기업가치의 향상에 기여를 하였다.

[ 출처: 대통령 기록원 ]

정리

사상최대의 호경기 "3저호황"을 맞이한 노태우 정권은 기존 정부와는 다르게 독자적인 정책형태를 보였다. 특히 1986년의 아시안게임, 1987년 6.29 선언, 1988년 서울올림픽 등은 막대한 사회적 비용으로 지불된 국가 손실비용은 해외의 3저 요인(국제 금리 인하, 국제유가 하락, 미국 달라가치 하락)들의 경제적 효과를 볼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88년 노태우정권 출범 첫해 안정화 정책으로 만족을 해야만 했다. 경제는 역사와 함께 반복된다는 진리가 있듯 호황이 있으면 불황이 다가온다는 것을 인지했어야 하지만 불황에 대한 대비책보다는 올림픽 이후 국가의 과잉홍보에 치중함으로써 국내외적으로 한국경제가 선진국 진입에 임박했다는 잘못된 인식을 유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3저호황"이 소별 된 후에는 내수진작에 의한 고성장을 추구하였으나 실패하면서 경제 상황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이 김영삼정권으로 이월되면서 또 다른 정책적 오류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신도시 건설로 인해 경기가 과열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론에 떠밀려 증시부양과 제조업 경쟁력 강화대책을 무리하게 추진한 결과 땅값 폭등과 물가 불안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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