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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회

70년대 1차 오일쇼크 2차 오일쇼크

by Stive Jo 202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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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의 가격인상과 원유생산의 제한으로 인하여 세계 각국에서 경제적 혼란이 일어났다. 1973년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아랍지역의 산유국들이 석유생산을 줄이고 가격을 인상하여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1차 오일쇼크

4차 중동전쟁이 시작되면서 OPEC의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주변 석유산유국에서는 석유 감산, 원유가격 인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했던 미국,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 일본 나라에서 피해를 많이 보았다. 당시 주도했던 사람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부 장관이었다. 3차 중동전쟁시절 아랍권은 석유 무기화를 (석유 가격 및 석유 생산량으로 주변국을 협박)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OPEC에서 석유금수 조치를 결의하고 수출을 중단했으나 이란, 미국을 비롯한 이란, 아프리카의 다른 산유국에서 원유 생산을 증산하면서 효과가 없었다. 더불어 원유 수출 시장점유율도 크게 상실했을 정도로 손해를 크게 입었다. 이러한 계기로 OPEC은 시장 점유율을 회복을 하기 위해 원유를 헐값에 팔아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OPEC의 국가는 미국을 비롯한 국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4차 중동전쟁이 시작하면서 매월 5%만 감산해도 시장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맞아 들어가 1배럴당 2.9달러였던 원유가격이 한 달 만에 12달러까지 올라갔다. 당시 친미 국가였던 베네수엘라와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와 비 OPEC국가인 소련도 석유가격을 대대적으로 인상하였다. 석유 무기화 전략은 4차 중동전쟁에서 일본과 유럽 공동체의 지지를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때문에 산유국은 호황기에 접어들었다. 반대로 3차 중동전쟁 후 시장점유율 상실로 헐값에 판매를 했던 원유가격이 폭등을 하면서 저유가가 상식이던 시대의 세계경제는  급작스런 폭등으로 이어지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중동의 석유 감산은 4차 중동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74년 3월에 원유 감산을 중단하였다. 이를 계기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스윙 프로듀서(석유시장 질서 주도국)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한국은 이를 계기로 1973년 3.2%였던 물가상승률이 1974년과 1975년에 동안 연 25%로 상승해 서민들은 고통을 겪었다. 원유값 폭등은 무역적 자폭을 크게 증가시켰다. 이때 중동은 오일 판매로 거둬들인 막대한 자본을 사회간접자본( 도로, 항만 )에 투자하는 계획을 세운다. 빠른 건설이 필요했기 때문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이때 한국에 건설사들이 참여하게 되어 많은 근로자들이 중동으로 빠르게 진출하게 되었다. 1975년 해외진출 한국인의 30%가 중동으로 파견되었는데 1980년에는 그 비중이 80%까지 증가했다. 이때 참여한 한국 기업으로는 현대건설, 대림산업, 삼환기업, 동아건설 등이 진출하였다. 이에 정부는 1976년 1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동경제협력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산하에 경제기획원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중동경제협력실무위원회'를 두었다. 원유가격 폭등으로 어려웠던 한국은 건설노동자를 중동지역으로 인력파견하여 막대한 외화자금을 벌어들이며 1차 오일쇼크를 극복하게 되었다. 이후 외화자금은 부동산 시장으로 유입되어 부동산 투기와 건설주식이 상승하여 물가상승의 결과로 가져왔다. 상승한 물가는 10%대를 유지하면서도 외화자금의 유입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상승하였다. 

2차 오일쇼크

1차 오일쇼크 이후 1979년 이란의 팔레비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공화국 정부가 수립하였던 이란 혁명의 원인으로 2차 오일쇼크가 일어났다. 이란혁명으로 중동국가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에 대한 공포심에서부터 일어난 오일쇼크는, 하루 생산량 600만 배럴에서 1978년 12월이란 혁명으로 파업이 진행되면서 200만 배럴까지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이에 오일가격은 40달러선까지 치솟았다. 이후 정권이 안정화되면서 오일생산량이 늘어났다. 오일생산량이 늘어났는데도 오일 가격은 상승한 가격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물가는 상승하면서 소비감소로 이어졌다. 그 결과로 실업률문제가 심각해지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다. 미국 FRB는 시중에 풀려있는 달러를 회수하기 위해 금리를 21%까지 인상했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화화를 차입하여 산업화를 진행하였다.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은 채무가 급증하여 경제가 크게 휘청거리게 되었다. 1979년 성장률은 8.7% 성장하였지만 물가 상승률은 18% 상승하여 기업의 파산과 실업률은 급증하여 1980년 1분기는 역성장하여 -1.6%였으며 물가는 29%로 급등해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다. 1차 오일쇼크와 2차 오일쇼크는 소련을 비롯한 여려 국가들의 공산권을 붕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 이후 동독, 체코슬로바키아를 중심으로 동유럽국가에서는 경제성장의 둔화와 수출 증대를 위해 투자를 늘렸다. 이때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 많은 돈을 빌려왔다. 1973년 1차 오일쇼크와 1978년 2차 오일쇼크로 재정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공산권 나라들은 복지비용을 줄였다. 인민들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면서 그나마 누려왔던 복지가 축소되면서 불면이 쌓이게 되고 공산정권을 지탱하던 결국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은 1980년대 말에 붕괴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아래 금본위제도의 붕괴와 석유파동으로 인해 케인즈 경제학파가 타격을 받고,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열렸다. 이후 원자재값 하락이 고금리와 겹치면서 중남미와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와 동유럽 국가에도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행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세계경제는 유동적인 자본의 흐름에 크게 의존하는 '불안정의 시대'로 접어들어 현재까지도 유동성 위기가 하나의 화두로 제시되고 있다. 오일쇼크가 끝나나 호황을 누리던 산유국들은 경제가 급속히 부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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