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ECONOMIC
경제.사회

1930년대 세계 공황. 블록 경제의 형성.제2차 세계대전 배경

by Stive Jo 2023. 4. 10.
반응형

개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는 자본주의 발달과 그에 내재한 모순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을 보였다.  1929년에는 미국의 주가 폭락을 계기로 대공황에 접어들었다. 미국의 공황은 과잉투자 및 생산에서 비롯되었다. 공업을 시작으로 농업과 금융등 경제 전반에 확대되며 장기간 이어졌다. 미국의 불황은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유럽 각국으로 확산되었다. 미국의 대공황으로 세계의 경제는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 내용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세계 공황

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 강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으로 국제 정치가 안정되었다. 유럽은 전쟁으로 피폐되었지만 미국은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얻게 되어 세계 경제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 배경은 자본 수출과 미국 자국 내에 투자를 확대했기 때문이다. 투자 확대는 미국 경기를 호황으로 이어져 미국에서는 주식투기가 이어졌다. 자동차, 가전, 건축, 철강 산업에서 과잉 생산이 일어났다. 미국의 경기는 호황인 반면에 농업, 방적업, 피혁, 석탄, 조선 산업은 불황이었고, 불경기 산업에 대해서는 소비와 수요의 확대가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일부 산업에서 과잉생산이 이어졌고 불안전 경기상태에서 재고증가, 생산축소, 기업도산, 실업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때문에 1929년 미국 증시 폭락을 시작으로 대공황은 시작되었다. 이러한 대공황은 장기간으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주변국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전 세계가 공황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일본경기도 불황에 빠졌다. 당시 일본은 은행 경영의 불안으로 금융 공황을 겪은 후 디플레이션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정지한 금본위제로 복귀하기 위해 긴축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당시 일본은 금 수출을 허가하였다. 금을 통하여 환율안정을 가져오고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금본위제의 경기 조절 기능으로 경제를 정상화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대공황과 맞물려 금이 대량으로 유출되었고 주가와 물가가 폭락하였고 기업도산으로 실업이 증가하는 한편 국제수지가 악화하였다. 특히 농산물 가격기 크게 폭락하여 농업 공황이 일어났다. 이 당시 쌀을 조선등으로 부터 유입해 가격 하락의 피해가 매우 컸다. 때움네 양잠과 쌀농사를 중심으로 하던 일본 농촌은 큰 타격을 입었다. 대공황을 계기로 금본위제가 무너지고 경기 순환의 흐름이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중심의 세계가 1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이 경제 패권국이 되는 과정을 가져왔다. 당시 미국은 패권국으로서 통화정책을 준비하지 못한 채 주자 자금을 거둬들여 각국의 유동성을 고갈시켰다. 

블록 경제의 형성과 제2차 세계대전 배경

1931년 영국이 금본위제를 정지하고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관세를 인상하고 저금리 정책을 실시하였다. 유럽의 강대국(영국, 프랑스 및 연방국과 식민지)을 동일 통화권으로 블록으로 설정하고 관세 협정을 맺었다. 높은 관세는 관세장벽을 만들 과 통상조약을 파기함으로써 다른 블록과의 무역을 차단하였다. 이로 인해 국제 무역액이 3분의 1로 줄었고, 블록경제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데 중점을 두고 세게 무역을 위축시키고 경제규모 자체를 축소시키는 악순환을 가져왔다. 미국도 관세를 부과해 수입을 규제하는 보호무역을 실시하였다. 이때 미국은 범 아메리카 회의를 통해 달러 블록을 격성 하였다. 소련의 경우 국가가 소비와 생산을 계획하는 경제구조에 기초해 중공업 생산량이 4배 이상 성장했고 실업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이 시기에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인즈는 "대공황에는 금융정책보다 소비를 직접 증대시키는 재정지출 정책이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케이즈는 세금감소 와 공공투자를 통해 투자를 늘리고 유효수요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했다. 즉,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수요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3년 미국 정부는 새로운 경제정책 "뉴딜( New Deal )을 실행하였다. 400만 명 고용 창출을 목표로 대규모 공공사업을 실행하고, 농업부문의 생산을 조정하였다. 그리고 노동 시가 단축과 최저 임금의 확보에 관여하고 노동자 권리를 확대하였다. 결과 노동자의 소득을 안정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한 미국 정부는 연방긴급구제국을 설립하고 최저 생활비를 지급하였다. 이것은 대공황에 대응한 최초의 구제기관으로서 사회보장제도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미국정부의 뉴딜 정책은 당시에 국제 정세로는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가 확산되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로 공격을 받기로 하였다. 그 과정을 통해 전국산업부흥법에 기초해 생산과 가격이 조정되는 카르텔 구조가 형성되었고, 자본이 국가 권력과 연계해 이윤을 증대시키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성격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편 유럽의 상황을 국가별로 정리를 하였다. 독일은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과 외국 투자에 의존해 경제를 유지하였다. 때문에 대공황의 영향은 심각하였다. 1931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관세동맹을 베르사유 조약 위빈이라고 비판하며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서 자본을 회수하였다. 그로 인해 유럽 전체에 금융위기가 일어났고 독일에서는 준비금 부족으로 은행이 파산하고 기업들이 줄지어 도산했다. 불안한 독일 사회는 강력한 지도자가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했다. 이때 나타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아돌프 히틀러가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독일 민족 지상주의와 국가주의에 기초해 반민주. 반공산. 반유대 주의를 사상으로 나치스의 당수가 되어 1933년 독일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한 뒤 영토 확장에 몰두하였다.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승리국이었지만 심각한 재정난에 처해 있었다. 1921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군인, 자본가, 지주 등의 지지를 얻어 국가 파시스트당을 결성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대외적으로는 1937년 베르사유 체제의 타파를 주장하며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에티오피아와 알바니아 등을 침략하였다. 1931년 일본은 금본위제를 정지하고 무역을 확대하였다. 이를 통해 경기를 회복했지만 서구의 블록경제와 대립하는 측면이 있어서 비판과 제약을 받았다. 이후 만주 침략과 만주국 건설로 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식민지 국가에 무역을 확대하여 경기회복을 하였다. 1930년대 중반 일부 국가는 블록경제와 수정 자본주의 정책으로 경기를 회복하고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국가는 산업통제와 국가 개입을 통해 공황에서 벗어났다. 그 과정에서 일본, 독일, 이탈리아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면서 국제협조 노선이 무너졌다. 그런 점에서 세계 대 공황은 2차 세계대전의 주요 배경이 되었다. 

반응형

댓글